‘괴물’이 그림에 나타난 까닭은? _ 퍼브릭아트, 최명열 기자
풍부한 상상력으로 말하는 자아와 자유의지
「80일간의 세계일주」로 잘 알려진 SF소설의 아버지 ‘쥘베른(Jules Verne)'. 그가 1870년에 집필한 「해저 2만리 (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에는 노틸러스 호와 네모 선장이 오징어를 닮은 거대 생명체에게 공격받는 섬뜩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자이언트 크라켄의 흡판이 U-보트인 노틸러스 잠수함의 창문에 달라붙어 있다. 이 거대한 오징어의 몸통은 8미터에 달하고 다리는 몸통의 두 배를 넘고, 괴물 같은 오징어의 나팔 같은 주둥이는 위협적으로 열렸다 닫혔다 한다.‥해치가 열리자 말자 다리가 잠수함 안으로 구불구불 들어간다. 네모 선장은 도끼를 들고서 괴물 같은 이 연체동물의 몸통으로부터 다리를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다리가 가련한 선원 한명을 낚아채 먹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소설 혹은 영화에서 인류를 공격하는 괴 생명체는 원초적 공포감을 안겨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을 유발시키거나 끝없는 도전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기도 하다. 실제로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1000만 종의 생명체 중 인류가 확인된 개체는 그 반에 반도 안 된다고 하니 전설 속에 살아 있는 설인이나 콩고 정글의 모케레 음베베, 가까이는 백두산 천지의 괴물이 마냥 허구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실체로 받아 들이기엔 여러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다. 또한 그 정체가 밝혀졌을 때 적잖이 실망할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백두산 천지연의 괴물이 가물치일 것이라는 어느 생물학자의 주장을 듣는 순간 기분이 왠지 모르게 다운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즐거운 상상의 유희를 위해, 풍부한 이야기꺼리를 위해 그 다양하고 신비로운 ‘괴물’들을 환영하면 된다. 머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하나의 전례동화처럼 즐겁고 유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생명체들이 자유롭게 누비는 공간이 강이나, 바다. 설원 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까이, 바로 그림 속에서도 살아 있다. 영화<괴물>에 나왔던 포르말린 괴물보다, 치아가 유난히 많아 인상에 남았던 <에어리언>의 조연보다 더욱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혼란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곤 하는 이 생명체의 주인은 의외로 반듯한 외모의 젊은 작가 이승현이다.
그의 그림에는 그로테스크한 화면에서 번지는 독특한 아우라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과 호기심을 잡아끄는 독특한 힘을 가진 신비의 생명체가 살아 움직인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바다 속 혹은 원시 정글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온 것처럼 진화나 환경에 대한 적응의 과정을 완전히 생략한 채, 아주 오래전부터 자유로운 형태로 그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는 형상은 현재의 생물학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어 당혹스럽다.
이승현이 이처럼 미확인생명체를 창조하는 작업은 얇은 선으로 생명의 최소 단위인 세포를 분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포를 토대로 모든 생명체가 번식을 거듭하듯 선과 선이 만나 확장을 이루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자웅동체(혹은 이체)가 완성되는 것이다. 생명의 번식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과정 중 작가가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과감 없이 드러내는 드로잉 작업을 통해 이뤄지며, 이는 작업의 시작은 있으되 과정과 결과의 경계는 무너지는, 작업의 끝을 짐작키 어려운 매우 독특한 현상을 연출하다. 작가조차 어느 순간 창조자가 아닌 관찰자의 입장으로 변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작품 속에서 풍기는 묘한 아우라가 되어 버리고 만다.
벽을 침범하거나 칠판이든 환풍기든 뭐든 먹어치우듯 증식과 변화를 무섭도록 이어나가는 드로잉 된 이미지는 말 그대로 괴물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점철된 형상들을 마주할 경우 정형화된 규범이란 틀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인지하려는 이들은 정해진 규범을 무시하며 분열과 증식을 거듭하는 형체로 인해 섬뜩한 기분을 체감할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그 속에는 규범이란 틀에 구속받기 싫어하는 작가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묻어 있기에, 조용히 주시한다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남다른 메시지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란 공동체 내 규범이란 틀 속에 안주한 인간들은 항상 이탈하지 않으려는 본능과 일탈의 욕구사이에서 갈등하기 마련이다. 이성과 감성의 끝없는 대립 속에 대부분의 사람이 이성의 손을 들어주지만, 작가 이승현은 감성 혹은 그 너머의 본능에 충실하며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업을 한다. 우리가 괴물이라 칭한 그것은 일탈의 욕구에 근거한 작업으로서, 유기적 관계로 얽히고설키며 이어진 형상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건 맞지만 이 역시 자율성으로 대표되는 자아의 특성을 내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지구상에 발견되지 않은 더욱 많은 생명체를 연구하는 미확인 동물학(Cryptozoology)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가 더욱 많은 모습을 드러내왔듯 무의식적 발현으로 빚어진 형상들도 변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남다른 미적 욕구와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새로운 모습을 탄생시킬 것이다. 물론, 무의식의 세계에서 꺼내놓는 이 괴물이 어떤 식으로 번식을 거듭해 나갈지 도통 짐작하기 힘들지만, 아니 정해진 방식이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기에 가늠하기가 어렵지만 작가 이승현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성장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모태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이승현이 창조해낸 생명체가 이제 관객들의 미적 욕구를 마구 침범하려 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허약한 인간은 무기라도 하나 집어 들고 이 생명체와 맞닥뜨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도, 무서워할 이유도 없다.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미적 쾌락에 남다른 전율이 진하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퍼브릭아트 2007.12
PUBLIC ART_ DECEMBER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