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스튜디오 어드바이징 프로그램 - 전문가와 만남

  '이승현(미술작가) & 최창호(심리학자)' 


 

최창호(이하 최): 저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승현(이하 이): 제 작품과 관련하여 미술이외의 분야에 계신 전문가와 만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제 작업과정이 의식적이거나 의식이면의 것과 관련하여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심리학자이시니 제 작업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듣고 싶어 선생님을 만나 뵙고자 하였습니다... (중략)

 

최: 천지창조적인 우주의 근원에 대한 의식에서 바라보기 힘든 바로 무의식적인 그중에서도 융의 집단무의식속에 숨겨져 있는 규명되지 않은 무의식 저변에 있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이나 형상화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구성은 또 오밀조밀 연결이 되어 있어 굉장치 치밀한 분이라는 것은 느꼈습니다. 구성, 연결 등이 디테일 하게 창조 하지만 그 안에서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이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저는 결과가 어떤 상태로 마무리 될 것인지를 정해놓지 않고 밑그림 없이 작업을 시작합니다. 선을 이용해서 드로잉 작업을 하다 보니 우연적 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형상들이 기존에 없는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보이기 시작하였고 말씀 하신 것처럼 만들어가는 세밀한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 중 작업에 집중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무의식에도 빠져 드는 것 같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새로운 생명체들을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 그것이 선생님이 창조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걸 다른 사람은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와는 너무 다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 날아다니는 동물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러한 것을 심리학에서는 현실에 대한 도피 내지는 자유롭고자하는 욕망의 표현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건가요?

 

이: 작업의 내용이 규정이나 규율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들이 전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몰입하다보면 저도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해요. 어느 순간에는 즐겁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자체에 빠지게 되요. 작업을 하다보면 그림 스스로 자가증식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제가 창조자가 되어 그 순간부터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목격하는 사람처럼 됩니다.

 

최: 우리가 느끼는 몰입 이후에 절정의 순간이 오면 굉장히 평온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 해서 마라토너들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고비를 넘겼을 때 뇌 속의 앤돌핀이 분비되며 오는 이룰 말할 수 없는 행복감과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단계가 된다면 평온한 상태에서의 관찰자 느낌으로 정적인 행복감이 더 느끼시는 순간에 그런 느낌이 오는 것 같습니다. 원래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나요?

보이지 않게 성적인 것도 있고 그런 에너지들이 이런 쪽으로 발산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나름대로 선생님 내면에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무의식속에서의 갈등이 있었을거에요. 어떤 기존의 관습이나 틀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어요. ‘00’라는 작가분이 있는데 결혼도 일찍 하시고 돈도 풍족하시니 창작은 잘 이루어 지지 않는 그런 미묘한 것들이 있더라고요.

 

이: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어느 쪽으로 소비가 되느냐에 따라 다른데, 한쪽으로 뭔가를 몰두 하다보면 다른 한쪽은 결핍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전 정신적인 독립이 늦은 만큼 아직 사회적인 철이 덜 든 것은 아닌가 생각해요.

 

최: 사회적인 철이 덜 든 것이 오히려 창작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나요? 저 같은 경우는 책 쓰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졸저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행복감을 느끼거든요. 강의도 많이 하고 방송도 하고 돈을 알고 나니깐 얼마 팔리지도 않는 책을 쓰는 것이 힘들어 지더라고요. 차일드 에고가 강한 사람들이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것을 소유하고 있어 창작에는 유리하죠. 그러면서도 프리차일드 에고를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창작도 유리하고 선생님 같은 경우도 스스로 유희하는거 자체가 복 받으신거죠. 작업을 하면서 너무 고통스럽게 하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어느 순간 단계가 되면 자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고 저런 것은 사람을 해치거나 하지는 않나요? 예를 들어 자기들끼리 싸운다거나 사람을 해친다거나 그런 것이 있나요?

 

이: 그런 스토리를 만들면서 작업을 하지는 않아요. 백지 상태 작업이 저한테는 편해요. 작업을 하다보면 연상되는 이미지를 쫓아가기도 하고 그야말로 손에서 나오는 대로 작업을 하기도 하는데 연상될 때는 하얀 여백 안에 다른 형상이 그려지진 않았지만 눈에 보이기 시작해요. 그것을 따라가면서 작업을 하는 재미가 있어요. 내가 그린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려나가는 작업자가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최: 어린 아이들이 마치 사물에 영혼이 있어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일종의 애니미즘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어린이 자아 속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죠. 그것이 심하면 환상, 환각, 착취 일수도 있다는 것이죠. 원래 창작하는 분들은 약간 정신분열적인 것이 있어줘야 되요.

 

이: 그러면서 이런 것이 제 손에서 나오기도 하고 의식이면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저는 작업을 하면서 이것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요.

 

최: 융은 집단무의식, 개인무의식으로 구분을 하는데, 개인무의식은 살아오면서 체험하는 경험의 무의식이라고 하면 집단 무의식은 우리의 인류가 가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인데 보통의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 것이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남들이 경험하기 힘든 세계죠. 어떤 사람들은 신화나 관습 같은 것을 얘기하지만 이걸 비디오 아트나 플레쉬나 그런 표현을 하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지 않을까 해요.

 

이: 지금은 우선 그리는 행위 차제에 관심이 많아 직성이 풀릴 때까지 해보고 싶어요. 규정화되고 틀지어지고 억압하는 것에 벗어나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그런 작업이 명화 이미지를 차용하는 작업으로 이어졌어요. 이건 얼마 전에 개인전을 했을 때 자료인데요, 기존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가상의 미술관을 만들어 전시를 했습니다. 다른 작업에 비해 공격적인 성향이 여기에서는 보여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최: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기존의 권위내지는 명성에 대한 리벨리우스, 차일드에고 라는 반항적인 자아가 여기서 보여지는 것 같아요. 언듯 보면 섬뜩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가만히 보다 보면 눈(雪)의 형태로 보여지기 때문에 너무 난해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명화의 차용에 바이러스를 침투한 것이 그림의 새로운 시도나 도전, 아니면 새로운 차원의 접근을 하였다는 느낌이 드네요.

 

뉴런이라 하는 신경원의 기본단위에서 보면 수상돌기와 연결된 신경의 흐름과 같아요. 신체내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연결된 사회적 관계(네트워크)처럼요. 초기 작품에서 프로이트와 연결한다면 번식이나 증식이나 생명의 연결같은 에로스적인 생에 본능적 체험들이 느껴지고 후기 작품은 공격과 바이러스의 개념들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본능적인 사회본능이 있고 공격적인 본능이 있는데 그로인해서 인간세상의 미래가 전쟁이든 갈등이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종족을 보존하고자하는 에로스적인 욕망이 있다면 또 죽음에 대한 에너지, 타나토스라고 표현을 하거든요 욕망 증식과 파괴, 두 가지의 욕망이 공전 무한한 증식 속에서 죽음, 유한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선생님 작품 경우는 초기가 에로스 적이라면 후기는 타나토스적인 죽음에 대해 내재되어있는 성향, 기존의 명화에 자유로부터의 도피, 지나친 자유는 불안함 이거든요.

 

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받아들이고 있어요. 지금까지의 작업은 미확인생명들을 발견하고 증식되는 과정을 옆에서 조율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서 어느 방향으로 성장을 할 것인지 열어둔 상태로 흘러 가는대로 놔두는 상태로 큰 나무줄기의 작업을 해오다가 곁가지로 명화이미지를 차용하는 작업이 하나 생긴 거였죠. 명화바이러스 시리즈는 이 전시로 마감하고 다시 큰 줄기의 성장을 찾아 가려합니다. 작업을 하다보면 언젠가 또 곁가지가 생길 수도 있겠죠. 어디서부터 이 작업이 시작되고 어떻게 이 과정을 왔는지 다시 거슬러 올라가 재점검하게 되더라고요. 좀 더 근원적인 것에서 시작을 했는데 다시 그 흐름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최: 회귀라는 것이, 처음 꿈꾸고 가려고 했던 것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지요.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무한이 자유로울 수도 없고 큰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죠. 그것이 회귀 본능일 수도 있고 어렸을 적 꿈으로 회귀 하는 것과 같이 결국은 초창기의 작품의 특성들이나 표현하고자했던 것들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 그런 과정이 한 발짝 뒤에서 보면 하나의 큰 틀 속에 있지 않나 싶어서 그 자체도 받아드려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결국에는 자유의지로 틀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또 다른 틀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러한 과정도 제가 작업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최: 뭐가 나올지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라 오히려 지금이 더 자유로울 수도 있고 마음을 비우고 로크가 ‘사람은 태어날 때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 하는데 백지상태로 태어나서 거기에 무엇이 쓰여 지는지는 나름대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쓰여 지는 것이고 어떻게 쓰여 지느냐는 달라지는 거죠. 그 백지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백지라는 것 자체가 근원적인 것이죠. 부정적으로는 리셋 신드롬이지만 그렇게 표현하기 보다는 태어나기전의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이: 오히려 백지 상태가 더 편하고 자유로워지죠. 다른 얘기인진 모르겠지만, 바둑에는 수많은 정석이 있는데 이것을 다 익힌 다음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잊어 버려야 더 큰 고수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처럼 자기성찰과 함께 잊어야 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최: 그게 기존에 가지고 있는 관습, 쉐마(도식, 스키마)의 틀을 가지고 있고 아무래도 정형화되고 거기서 벗어나기가 힘든데요, 백지상태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자유로운 상태이기 때문에 그 경지에 이른 다는 것은 자유 의지의 궁극적인 발현이죠. ‘shure슈레’라는 ‘자유로운 영혼’ 이라고 하는데 이 단계는, 고수의 단계가 되는 것이죠. 아마 그 단계에 못가면 못 보는 것이죠. 예전에 병안에 있는 새를 어떻게 꺼내야 되느냐? 불교에서의 물음이 있는데 스님에게 그 질문을 했더니 스님께서는 ‘그걸 말씀을 드린다 한들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하셨어요. 유치원생에게 고등학생 미적분을 알려줘도 받아드리기 어려운 것처럼요. 그 단계가 되면 공자가 말했듯이 그 순간이 되면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법이기도 하고 진리이기도 하고 세상이 달리 보이겠죠? 지금은 그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세상을 보면 소재나 표현들이 전혀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그림을 시도할 수도 있고 그런데 그런 것을 준비를 안하고 계셔도 두렵지 않으신거고 얼마나 부럽고 대단하신건가요. 보통 내공가지고는 되는게 아니죠.

 

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중 진정성을 운운 하며 내공을 말하곤 하는데 그 내공의 정체는 뭐라 생각하세요?

 

최: 심리적으로는 자기세계의 도취감 몰입(flow로 요즘은 표현합니다. 절정감) 이라고 하는데 집중해서 주변의 아무것도 안보이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 상태를 지속시키는 상태가 ‘flow’의 상태하는 것이죠. 성인이면서도‘flow’한 상태를 만들면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내공의 단계가 아닐까 생각을 해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세속의 명성, 돈을 개의치 않고 창작과 표현할 수 있는 ‘flow’의 상태 그런 상태가 되면 그것에서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성적인 것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희열, 절정감을 느낄때를 말하는 것이죠. 결국 내공의 마지막단계는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심플하고 단순한 것이 아닐까요? 내공도 자기만의 단순하고 자유로운 단계가 아닐까 그림도 의미도 중요하지만 나중에는 그 의미에 때문에 표현에 구속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작품에서 두 가지가 경합하는 것으로 보여요. 굉장히 우주적이고 거대하고 그렇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DNA세포의 움직임처럼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의 조화인 듯해요. 하나하나의 세포를 심듯이 구현하는 듯하고요. 물론 거대함에 대한 자유로움에 대한 것도 있지만 결국은 생물학적 근원에 대한 표현의 기본단위에 대한 관심이 있는 듯해요.

 

이: 작업을 하면서 생명의 근원적인 속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최: 아주 작은 입자의 최소 단위들이 뭉치고 뭉쳐서 재료를 만들고 형상을 만들고 하는 입자론적인 관점인 반면 아주 근원적인 것에서는 에너지의 진동이 합쳐져서 최소단위를 만들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가는듯한 표현들 ‘진동이냐 입자냐’는 것이죠. 선생님 작품의 연결들을 보면 최소단위의 입자적인 표현으로 보이지만 에너지 기의 표현이 된다면 뭔가 역동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상의 기초적인 단위를 입자로 표현할 것이냐 아니면 진동으로 표현할 것이냐 두 가지인데 저는 진동적인 것을 선호하는 편이고 사물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어요. 예를 들어, 일본학자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 사진이 있는데 물도 사람의 감정을 받아들이더라는 거에요. 물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면 물의 사진이 이쁘게 나오고 물을 미워하면 사진이 안 찍혀요.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는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 까 합니다.

 

이: 제 그림에서는 규칙이 없이 여러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뭐라 규정할 수 없는 방향으로 분열하긴 하지만 작업자가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모르는 질서가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어요. 무질서이면서도 질서가 있고 그 사이를 지나면서 이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요.

 

최: 보이지 않게 분열이나 증식 사람들에게는 개체를 보존하려는 욕망, 종족 보존에 대한 욕망이 있잖아요, 아마도 미혼이시니깐 종족 보존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증식에 대한 관점이나 관심으로 갔을 수도 있고 그러면서도 이성에 대한 상처나 두려움이 자아 분열(자기세포분열)이 나타났을 수도 있어요. 아무튼 자신의 아바타나 심리학에서는 더블(double) 이라는 용어로 표현을 해요. 그것이 나의 또 다른 자아인지 아니면 정말 이성이든 성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이든지 자체적으로 분열해 나가는 것으로 나가는 것인지..

 

이: 자기 방어기제가 있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라는 건가요?

 

최: 한 자아 분열로 자기 방어를 통해서 자신이 다치기 싫은 것도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나르시시즘 분열도 있는 거 같아요. 그것이 자기의 또 다른 표현 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예술가가 되려면 나르시시즘이 있어야 하죠. 그런 표현일지도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르시시즘이 컴플레스나 사회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이고 사실 나르시시즘을 잘 자극하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잘하는데 상대방의 나르시시즘을 잘 자극해 줘야 사회생활을 잘 하는 것이죠. 그런데 자기의 나르시시즘을 자극하는 것은 자아도치이기 때문에 그걸 누군가 알아주지 않으면 외로운 것이거든요. 알아주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표현 될 수 있죠.

 

이: 자기방어적인 기제를 발견할 때가 있었는데 저에게 트라우마 같이 상처가 될 만한 기억들은 저도 모르게 지우는 지우개가 있는 듯해요. 그것이 나 자신을 방어하기위한 의도적인 기억상실증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요.

 

최: 자기방어기제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중략)

 

이승현-축약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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