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를 잠식한 이승현의 미확인 드로잉
백곤 (미학, 스페이스 캔 전시팀장)
이승현의 미확인 생물의 연구는 확인되기 위해 끊임없이 증식한다. 그는 몬스터에서 미확인 동물, 미확인 바이러스에서 명화바이러스까지 마구잡이로 사물들을 잡아먹는다. 그의 작품의 힘은 바로 드로잉에서부터 나온다. 그는 드로잉을 통해 동물이나 식물, 혹은 미생물과 같은 세포질의 형상을 펼쳐 놓는다. 아마도 그의 미확인 생물은 우리가 흔히 하는 낙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전화를 하면서 연필로 종이 위를 끄적거리다가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형체를 발견하는 것처럼 이승현의 작품은 어느 정도 친근함이 있다. 이 승현의 이번 전시 <미확인 미술관 crypto-MUSEUM>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확인해야 할 것들, 작품에 대해 생각해야 할 지점들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그린 것일까?' 열심히 찾아보는 관람객의 시선을 그는 확인 해 보라는 듯 이미지를 펼쳐놓는다. 이번 전시는 그나마 몇 가지 관람의 팁을 주고 있다. 미술교육을 받은 모든 이들이 알 수 있는 반 고흐, 베르미어, 쇠라, 피카소,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마네 등 대가들의 작품을 토대로 먹 드로잉 작품을 내 놓은 것이다. 물론 그렇기에 감상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관객들은 그의 작품에서 베르미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찾고,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발견하고, 반 고흐의 <자화상>을 읽어낸다. 그것이 감상의 끝이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잘 손질된 재현이미지를 이미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미확인 생물이 명화의 형태를 잠식했다고 하나 명화가 뿜어내는 형태의 에너지에 기대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바로 이 지점이 이승현이 추구하고자 했던 작품의 의도이기에 그의 드로잉이 생명력을 얻는 것이다. 그는 고착화되어 있는 권력, 혹은 규율에 대한 시선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 방식이 명화가 주는 강렬한 이미지였고, 그 명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미적 질서, 혹은 미술사적 권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드로잉을 진전시켰다. 명화를 잠식한 그의 드로잉이 실제 명화의 형상을 잘 드러냈다는 것은 그 만큼 그의 미확인 생명체가 명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념에 잘 달라붙었다는 이야기이다. 그의 미확인 생명체는 특정의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드로잉으로 언제나 풀어헤침이 가능하다. 이전의 그의 전시를 통해 확인된 바, 이는 그의 손끝에서 오는 자율적인 이미지 메이킹의 한 방식이라고 한다. 그의 드로잉은 잠시 동안 명화의 권위에 달라붙어 있다가 스스로 증식하여 이를 풀어 헤치고 개연성 없는 이미지들로 추상화된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 미술사에 남기 위해, 명작을 선보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시대 작가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과 같이 그의 드로잉은 생명력을 가지고 화면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기괴하고 징그럽고, 그로테스크한 그의 작품이 가진 매력은 그것이 무수히 많은 선들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승현의 작품은 단지 그림이 아닌 무수히 많은 붓질을 통해 완성된 드로잉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물론 이번 전시에는 먹으로 표현을 하였으나 먹의 농도와 붓의 강도에 의해 진하고 희미한 변화를 주어 화면에서의 깊이감이 돋보인다. 특히 <게르니카>의 웅장함은 전쟁의 잔혹함과 상처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명화의 구조를 그대로 표현 하면서도 드로잉 감각을 잃지 않는 기법을 통해 작품 스스로 자율성을 획득 해 나간 경우라 할 수 잇다.
그가 설정한 '미확인 생명체' 드로잉은 이제 무한 확장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풀어내야 할 숙제가 있다. 꾸물거리는 생명체의 형상을 단지 이질적이고 변형적인 이미지, 혹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증식되는 관념들로 규정시킬 것이 아니라 이러한 드로잉을 통해 예술이 추구해야 할 역할과 의미로 풀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슬라브 베진스키 (Zdzislaw Beksinski)의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통해 우리가 인간의 영환과 삶의 진리에 대해 더욱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승현의 미확인, 괴물, 혹은 세포질의 육체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이 명화와 인식사이를 오고 가는 증식이 아니라 생명체가 가진 육체를 통한 정신적 근본에 대한 고민을 가틍케 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손에 자유로운 선을 긋게끔 맞겨 두는 것이다.
[출전] 미술세계 9월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