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과 의식으로의 경로에서 “스르르”
PAGEROOM8(페이지룸8) [페이지룸에잇]은 이승현 작가의 개인전, 《무명의 순간_스르르(Nameless Moment_Srrr》를 4월 1일부터 4월 24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기획자의 관점에서 현재 중요한 기점이 되는 작품 한 점에서 시작하여 작품 세계를 되짚어 보는 ‘이 작품 시리즈’의 일환으로 기획한 것이다. 그리고 2019년 이승현 작가의 개인전 《 Beyond 》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기도 하다.
이승현 작가의 자율적인 드로잉은 공식적으로 2004년 첫 개인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가 종이와 펜 하나로 그리는 드로잉은 처음에는 무의식의 산물로 여겨지면서 ‘미확인 생명체’, ‘몬스터’ 등 보는 이들에 의해 호명되고 규정되었다. 반면 2014년 《반상 변이》를 기점으로 작가의 통제가 느껴지는 기작이 등장한다. 단, 바둑판에 드로잉으로 생성되는 형상들을 경쟁시키는 전체적인 틀은 보였지만, 격자 위에 존재하는 형상에 대해서는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이후 2019년 개인전 《 Beyond 》에서 비정형 드로잉에 대한 실마리가 던져진다. 일상의 사실적인 풍경과 작가만의 드로잉이 유기적으로 얽히며 오버랩되어 있는 모습이었고, 시각적 이미지와 시각으로 인지되기 전 단계의 이미지가 혼재된 듯한 형상이었다.
기획자가 2019년 개인전 《 Beyond 》당시, 가장 의미 있게 본 작품은 〈 Cube 06 〉이다. 이 작품은 총 8점의 시리즈 작품 중 하나이며, ‘큐브 속의 큐브’라는 형태에서 주목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마치 큐브가 증식되고 있는 모습은 작가 스스로 이 드로잉을 통제하려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자동기술적인 신체적인 행위 역시 의식 체계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자 기록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신작 ‘무명의 순간_스르르’ 시리즈는 제작 과정이 좀 더 과감해졌다.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사진으로 취한 확실한 이미지를 직접 캔버스에 그려 ‘본다’라는 행위를 개입시킨다. 이것을 특별한 미디엄으로 이미지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모두 덮어 가린다. 그 위에 아크릴 펜으로 작가만의 시그니처 드로잉을 그리는 양식을 도입했다. 이 제작 형식은 작가가 ‘통제자’로서 드로잉의 제작 전반에 대한 순서와 공식을 설정하고, 이것을 마치 시연하듯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무의식과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통찰한 중요한 사실은 ‘본다’는 행위에 수반되는 무수히 많은 감각들은 “무명의 순간”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감각의 과정에서 생성된 것들 역시 무명(無名)인 상태일 수밖에 없다. 이 상태를 끄집어 낸 것이 바로 “스르르”이다.
시각은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발달되고 예민한 감각이다. 보통 물체에서 나온 빛이 망막에 맺히는데 100만 개의 신경세포 다발이 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 과정을 거쳐 인간의 시신경을 통해 물체의 형태가 인지되는 것이다.
이승현 작가의 “무명의 순간_스르르”는 눈으로 어떤 형태를 인지하기까지 걸리는 규정되지 않은 순간을 기록하여 그 생리학적인 기작을 예술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망막과 시신경의 이동 경로에서 이미지로서 존재하기 이전에 그 구조에 형상이 붙으며 생성되어가는 과정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규정되지 않고 비정형으로 일관되는 이승현 작가의 작품 속 형상들을 작가가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캔버스’라는 이미지 틀을 만들어 그 위에 얹혀놓음으로써, 작가 스스로 이 선(線)으로 일군 드로잉들을 어떻게 현존시켜야 할지에 대한 물음이자 방법적 단서였을지도 모른다.
이승현 작가는 〈무명의 순간_스르르〉 작품들을 통해 더 이상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 미지의 생명체로 이해되는 것에 대한 확대 해석을 잠식시키고, 작가의 통제와 감독 하에 “스르르” 하고 존재하는 하나의 그림으로써 제안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 박정원 (페이지룸8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