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정신적 풍경을 마주하는 것

이승현 개인전 <감으면 펼쳐지는>, <펼치면 마주하는> 리뷰

글 백아영

 

 

한 작가가 눈을 감고 서 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암흑 속에서 대상을 의식하려고 노력한다. 눈을 뜨고 바라볼 때에는 보이지 않던 형상이 조금씩 드러나는 순간, 그의 시선을 통과하며 하나둘씩 선명히 떠오르는 형상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이승현은 페이지룸8에서 열린 개인전 <감으면 펼쳐지는>에서 공간의 구조, 표면, 질감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즉흥적으로 획을 이어 나가,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는 벽화를 완성했다. 이 과정은 마치 자신의 내면을 떠다니는 무형의 세포들을 하나씩 움켜잡아 실체적 지형에 줄줄이 풀어놓으려는 듯 보였다. 이들은 작가가 안내하는 무의식의 경로를 따라 해체와 결합, 축소와 확대를 반복하며 새하얀 벽 위에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았고, 그 안에서 꿈틀대며 역동적 장면을 만들어 나갔다. 작가가 그려 나간 획과 도형들은 때로는 뒤섞여 덩어리 진 모습으로 멈추기도, 때로는 평평한 벽을 타고 뻗어가거나 모서리를 여유롭게 굴절하며 흘러가기도 했다. 불확실한 미지의 차원에 자리하던 무형의 존재들이 이승현의 집착적이고 환각적이기까지 한 드로잉을 거쳐 단숨에 생명력을 지닌 유형적 개체로 탈바꿈한 것이다.

작가의 손에서 빠져나온 존재들은 일순간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 나가며 벽면 위에 자리 잡는다. 벽을 가득 채운 움직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승현에게 이 과정은 본능에 가깝다. 그는 방향을 제안하지만 완전히 통제하지는 않는다. 이 단계에서는 작품 스스로 이미 물질성을 보유한 채로 관람객을 작가의 정신적 공간으로 인도한다.

 

작가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다.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뜨는 순간 흐릿하던 초점이 점점 선명해지듯, 이내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붉은 꽃, 푸른 잎, 건축물과 거리 등 실제로 마주하고 경험한 풍경의 조각을 하나둘씩 눈에 담아 캔버스로 옮긴다. 그 장면을 흐릿하게 처리한 후, 잔상처럼 남은 배경 위로 다시 획을 얹는다. 또렷한 획과 형상이 잔상과 대조를 이루며 곳곳에 똬리를 튼다.

이승현은 스페이스 카다로그에서 열린 개인전 <펼치면 마주하는>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출발한 신작 16점을 선보였다. 작가의 표현대로 "전통적 그리기 방식의 역순"으로 제작한 작품들이다. 작가는 멈춰 있는 장면이라 해도 그 너머에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대상의 내부로 파고들어 이미지 자체가 지닌 에너지를 발굴해내어 관찰자로서 받아들인 정보를 드로잉으로 이미지화했다. 그가 선형적 사고를 해체시키며 그어 나간 획과 제스처가 생생하게 맥동하며 관계를 재형성하고 서로 연결지점을 찾아 나섰다.

이렇듯 마치 표면 아래 존재하는 무언가를 밖으로 끄집어내듯, 기억과 서사의 조각을 모아 부재와 존재의 균형을 맞춘 그의 작품은 불확실한 차원과 유형적 공간 사이 경계에 자리한다. 얼핏 무정형의 세포 혹은 균열처럼 보이기도 하는 드로잉은 작가가 내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해 발견한 본질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가는 외부 세계를 새롭게 인식한다.

 

20여 년에 걸쳐 묵묵히 자신의 존재감을 쌓으며 작품 세계를 구축한 이승현은 각기 다른 세 공간에서 펼쳐진 이번 전시에서 스스로 제약을 두지 않는 열린 자세와 섬세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필치로 자신만의 세상을 펼쳐냈다. 페이지룸8에서 즉흥 벽화를, 스페이스 카다로그에서 ‘무명의 순간’ 시리즈 신작을, 카페 카다로그에서 미공개 작품을 선보이며 파편화된 조각을 모아 하나의 다층적 전시를 완성했다. 페이지룸8 공간에서는 환경적 단서가 제거된 허공에 선을 그어 나갔다면, 스페이스 카다로그 공간에서는 잔상처럼 맺혀 있는 작가의 기억 속 중립적 경계 위에 드로잉을 그려 나갔다.

이승현이 치밀하고 치열하게 그려 나간 작품들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렌즈이자 통로로서 톡톡히 제 역할을 해냈다. 관람객이 작가가 설정한 경계를 자유롭게 표류하는 동안, 작품들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고, 목소리를 내고, 진화하며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했다. 이렇게 작품이 관람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가 된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피상성을 벗어나 그의 내면을 다시 한번 인식할 수 있다.

자, 이제 이승현의 작품을 마주하고 무수한 점과 선의 흐름을 끈질기게 눈으로 따라가 보자. 작가의 행위를 따라 눈을 감았다 뜨는 과정에서 그의 내적 심상에 초점을 맞춘 풍경, 즉 무의식의 세계를 맞닥뜨릴 수 있다. 같은 그림을 바라본다 해도 각자 경험하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